[종의 기원] 1권

한국서 만화를 원작으로 한 2차 콘텐츠 제작은 활발하지만 다른 원작을 만화로 각색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의 기대효과 중 하나는 평소 만화에 큰 관심이 없던 원작의 매니아들을 이 과정을 통해 조금이라도 만화시장에 유입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앞으로 만화시장, 특히 출판만화가 걸어가야 하는 다양한 루트 중 하나로 독자들에게 작품 이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더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기존 출판만화에 종사하는 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출판만화는 이미 끝났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것은 소위 "질 나쁜 싼 종이에 잉크 묻혀 내보내 회전율로 돈을 벌던 시절"이 끝났다는 이야기일 뿐, 출판만화도 아동용 만화, 독창성을 활용한 독립출판 만화, 퀄리티의 고급화를 통한 그래픽 노블이 웹툰과 다른 구매력을 가진 시장으로 남아있고 발전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한 루트가 아직 시각예술로 승화된 적 없는 원작을 만화로 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 [종의 기원]은 [7년의 밤]으로 유명한 정유정 작가의 장편소설을 모티브로 하여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제작지원을 했고 웹툰 연재 후 출간된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종의 기원]의 기획에 대해 처음 듣게 된 것은 2017년 9월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한국 정식개봉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할 때였다. 관련해 설명을 들으며 소설을 원작으로 기획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듣고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시각화된 적 없는 이야기를 시각예술인 만화로 풀어낸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의 프리퀄로 웹툰을 활용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는데 둘 다 시각예술이라는 점에서 상충하거나 괴리되는 부분들이 존재했고 큰 효과나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덕분에 음악을 원작으로 하거나 문학(소설,시,수필) 형태의 예술을 원작으로 작업하는 만화를 보고 싶었고 그 원작이 너무 오래된 고전에서 찾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스토리 안에서도 다양한 각색과 표현을 통해 더욱 깊이감 있게  콘텐츠를 즐기는 스타일이 특히 만화시장에서 매우 메말라 있다. 만약 [종의 기원]은 그런 의미로 출발하였고 소비자 가격에 대한 부담이 조금 덜 했었다면 양장본으로 출간되었어야 했다. 원작의 무게감과 그림의 퀄리티, 그리고 색의 뚜렷함을 독자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아트지 위로 손에 들렸을 때의 묵직한 양장이 더해졌다면 그 비용만큼이나 더욱 진지하게 다가갔을 것이고 앞으로 출판만화가 나아가야 하는 좋은 기획 및 제작의 상징적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원작을 읽으며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걸 만화로 어떻게 옮기지?"였다. 시작부터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독백(방백) 때문이었다. 원래 대중, 상업만화를 제작할 때 대부분은 나레이션, 그중에서도 1인칭의 독백은 최소화하고 그 독백의 내용과 컷의 연출이 중복되지 않도록 고민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만화로 옮기기엔 너무 많은 부분에서 그 중심을 잡기 힘들어 보였다. 직접 만드는 만화가의 입장에선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흥미로웠던 지점은 글의 분위기나 주인공의 독백내용이 그래픽 노블에 매우 적합하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타인에게 입 밖으로 표현하기 전까지 수많은 생각을 오간다. 그 속에서 가끔은 굉장한 나르시시즘에 빠지기도 하고 정말 끔찍한 기우 또는 불타오르는 분노를 내면에서 언어화시키는데 그래픽 노블의 첫 번째 매력이 그림의 퀄리티에 있다면 그 언저리에 이런 한 인간의 다양한 내면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해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것 또한 그 매력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는 만화로 옮기기에 매우 적합해 보였다. 정리하자면 만화로 만들기 어렵겠지만 잘만 만든다면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고 개미 작가의 [종의 기원] 1권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보인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일정량 이상의 압력을 유지한다. 그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의 퀄리티를 유지하며 극의 몰입을 돕는다. 특히 자유롭게 오가는 앵글 변화 속의 인물들을 보면 작가의 자신 있는 표현력이 잘 전달된다. 덕분에 앞서 설명한 나레이션과 화면의 중복을 최소화하며 원작의 글에서 묘사하고 있는 주인공 유진의 행동들을 지루하지 않게 전달 할 수 있었다. 캐릭터의 컬러링 작업을 통한 깊이감이나 명암의 조절이 아닌 대부분을 선의 굵기를 통해 표현해내는 점에서 "이 작가는 정통만화로서의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상황에 따른 온도를 느낄 수 있게 컬러 매트의 색을 바꿔주면서 좀 더 다양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래서 상황마다 내가 정말 유진의 등 뒤를 따라다니며 모든 상황을 보고 있는 것 같았고 하나의 사건과 깨진 유리 파편 같은 기억들을 쫓아가는 것, 또 그 상황의 변화가 일어나는 1권의 끝까지 도달하는데 집중력을 크게 잃지 않고 읽어갈 수 있었다.


원작의 나레이션 중 은유적 표현들을 회화의 느낌으로 연출한 컷들도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너무 다양하거나 다량으로 욱여넣지 않았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고마웠다. 이 또한 앞서 말한 캐릭터의 방백과 연결되는데 작가의 입장에선 나레이션과 컷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행동이 너무 일치하지 않도록 하는 고민과 함께 캐릭터의 감정과 유진의 추측의 표현에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매번 회화적으로 꾸미거나 길게 늘어트리면 연출을 하는 입장에선 쉽게 해결될 수 있지만, 너무 잦은 공간의 이동으로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거나 혼란을 줄 수 있었는데 작가는 약간 어려운 길을 택해 그 완급조절을 어느 정도 해냄으로써 안정감을 보여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책의 편집이다. 예를 들면 24페이지의 검은색 배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부터 컷마다 위, 아래, 양 옆이 1픽셀씩 깨져있거나 색이 나가 있다.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컨셉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또한 같은 컷의 웹툰 연재분량과 확인해 본 결과 아쉽지만, 편집에서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컷의 제작방식을 유추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각 컷에 어울리는 텍스쳐나 컬러 매트를 깔아두었고 그 위에 각 컷을 둘러싼 검은 선을 다른 레이어로 올려두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웹툰에서는 이 과정이 잘 지켜졌고 문제가 없었지만, 책 편집을 위해 옮겨지거나 레이아웃을 새롭게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쉽게도 가장 위에 있는 겉 선 레이어가 함께 작업 되지는 못한 것 같다.


휴민트를 통해 알아본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출판제작에 있어 시간이 촉박했던 이유를 분명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극의 긴장도와 압력이 높고 묵직한 작품이라 이런 편집은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데 누구 옆에서 툭!툭!치면서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 그 때문에 이 점은 매우 아쉬웠고 만약 2쇄를 준비하게 된다면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그래도 개미 작가의 [종의 기원]은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하고 그 시도에 큰 박수를 보내며 2권이 나오면 곧바로 살 예정이다. 앞으로의 표현도 궁금하고 극의 결말도 소설과 다를지, 같다면 어떤 모습으로 연출될지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런 원작을 통한 만화제작이 성인독자를 타겟으로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혹시 만화책 1권의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저스툰을 통해 감상 할 수 있고 출판만화와는 또 다른 연출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되었고 2018년 6월 기준 14,800원이다.


끝.


* 본 리뷰/평론은 이재민 웹론평론가와 성인수 만화평론가/작가 공동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이재민 웹툰평론가는 웹툰을 기준으로, 성인수 만화평론가/작가는 출판만화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이재민(푸른봄) 웹툰평론가 웹툰 평론 "이토록 숨막히는 콜라보레이션, <종의 기원>"
* 성인수 만화평론가/작가의 출판만화 평론 "[종의 기원]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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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약물중독자들은 대부분 환상을 쫓느라 약을 먹는다. 내 경우는 반대다. 환상을 얻으려면 약을 끊어야 한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며칠간 끊은 유진은 피 비린내를 맡으며 잠에서 깬다. 그리고 피투성이인 방과,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베스트셀러 소설 <종의 기원>을 웹툰으로 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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